신라의 유학자, 언어학자이자 동국18현의 첫 현인. 시호(諡號)는 홍유후(弘儒侯). 할아버지는 나마 담날(談捺), 아버지는 원효대사 설서당(薛誓幢)이며 어머니는 태종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이다. 자(字)는 총지(聰智)이며 경주 설씨 시조 호진(虎珍)의 후손으로, 설총은 경주 설씨의 중시조이다. 한글 이전 고대 한국어의 표기법인 이두(吏讀)를 집대성했으며 신라에 유교를 확립시킨 뛰어난 유학자로, 약간 앞 세대의 사람인 강수(強首), 후대의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 삼현으로 추앙받았다. 아버지 원효대사가 승려 출신[6]인 것은 여러모로 유명하지만 설총은 아버지와 달리 유학자였다. 단, 약간 앞 세대의 또 다른 대표적 유학자 강수는 불교가 세속을 도외시했다고 비판하며 유교를 강조하는 입장이었던 것과 달리 설총은 아버지 원효의 영향을 받았다. 원효의 골품을 따라 설총 또한 6두품이다. 설총의 탄생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그의 아버지는 고승 원효(본명 설서당)라고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가 해골물을 먹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한 뒤에 노래를 지어 불법을 전했는데 갑자기 그가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줄 것인가 내가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지을 텐데"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아무도 원효가 부르는 노래의 의미를 알지 못하던 중, 태종 무열왕이 이를 듣고서는 "원효가 자기한테 여자를 주면 뛰어난 현자를 낳게 하겠다라는 거로구나"라고 하고선 원효를 자신의 과부된 딸인 요석공주와 맺어주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관리를 보내 원효를 데려오게 했는데 문천교라는 다리를 지나던 원효가 일부러 발을 헛디뎌서 물에 빠져버렸다. 관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데려가서 옷을 말리게 했는데, 옷이 마르기를 기다리다가 요석궁에 있던 요석공주와 하룻밤을 보냈고 그래서 나온 아들이 바로 설총이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설총은 무열왕의 외손자가 되는 셈이다. 요석공주의 원래 남편은 정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사서에 나오는 무열왕의 사위 중 젊을 때 사망한 게 확실한 인물이 김흠운뿐이라 대체로 김흠운이 원래 남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문왕의 계비이자 효소왕, 성덕왕의 어머니인 신목왕후가 김흠운의 딸이기 때문에 요석공주가 김흠운의 부인이 맞다면 신목왕후는 설총의 이부 누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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